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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히틀러 ,악마의 속삭임: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그 흥망성쇠와 숨겨진 이야기

by 파라Bom역사 2024. 7. 1.

안녕하세요. '파라Bom의 역사이야기' 입니다.

 

앞으로 재미난 세계사, 한국사, 신화 등등 재미난 역사이야기들을 짧고 굵게! 펼쳐 나가 볼텐데요.

 

오늘 첫번째로 다룰 인물은 바로 "세계 최악의 악당". 바로 20세기를 공포로 물들인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히틀러에 대해서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예술가의 꿈과 좌절: 히틀러의 초기 인생

           1.1.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의 탄생과 어린 시절

           1.2. 빈에서의 방랑 생활과 미술학교 입학 실패

2.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극단적 사상

           1.1.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군 생활

           1.2. 반유대주의와 극우 민족주의 사상의 형성

3.나치당의 탄생과 성장: 혼돈의 시대를 틈타

           3.1.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과 나치당의 창당

           3.2. 뮌헨 폭동과 "나의 투쟁" 집필

4.합법적 독재자의 탄생: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들다

           4.1. 대공황과 나치당의 부상

           4.2. 총리 취임과 전권위임법: 민주주의의 종말

5.제3제국의 건설: '새로운 독일'의 암울한 비전

           5.1. 글라이히샬퉁: 모든 권력의 나치화

           5.2.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책의 본격화

6.전쟁으로 치닫는 유럽: 히틀러의 팽창 정책

           6.1. 재무장과 라인란트 진주: 서방의 유화정책

           6.2.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7.세계대전의 발발과 나치의 전성기

           7.1. 폴란드 침공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7.2. 번개전의 성공과 유럽 대륙 지배

8.홀로코스트: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

           8.1. 최종해결책과 체계적 학살의 시작

           8.2. 죽음의 수용소와 대량 학살의 실상

9.제3제국의 몰락: 광기의 끝

           9.1. 소련 침공의 실패와 전세 역전

           9.2. 베를린 함락과 히틀러의 최후

10.예술가의 꿈과 좌절: 히틀러의 초기 인생

 

 

 

1.예술가의 꿈과 좌절: 히틀러의 초기 인생

 

1.1.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의 탄생과 어린 시절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당시 누구도 이 아이가 후에 20세기 최악의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세관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클라라는 가정주부였습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보였다고 합니다.

 

 

1.2. 빈에서의 방랑 생활과 미술학교 입학 실패

 

청소년기에 접어든 히틀러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빈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1907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빈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낙방하게 됩니다.

 

이 시기 히틀러의 그림들을 보면, 건물이나 풍경을 그리는 데는 재능이 있었지만 인물 묘사에는 약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빈 미술 아카데미(https://www.akbild.ac.at/)는 현재도 히틀러의 입학 시험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초기 예술적 역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입학 실패 후 히틀러는 빈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 그는 잡다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빈의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점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을 키워갔다고 합니다.

 

2.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극단적 사상

 

2.1.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군 생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바이에른 연대에 자원입대합니다.

 

그는 전쟁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회고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전쟁 광적인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 중 히틀러는 전령병으로 복무했으며, 용맹함을 인정받아 1급 철십자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18년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극도의 좌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2.2. 반유대주의와 극우 민족주의 사상의 형성

 

전쟁 후 히틀러는 독일의 패전이 '배후의 칼에 찔린'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배신했다는 음모론에 빠져들었고, 이는 그의 극단적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3.나치당의 탄생과 성장: 혼돈의 시대를 틈타

 

3.1.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과 나치당의 창당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1919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초인플레이션,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극단주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1919년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DAP)에 가입했고, 이듬해 이 당의 이름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즉 나치당으로 바꾸었습니다.

 

히틀러는 뛰어난 연설 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당내에서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3.2. 뮌헨 폭동과 "나의 투쟁" 집필

 

1923년 11월,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체포됩니다.

 

이 사건은 '뮌헨 폭동' 또는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체포 후 히틀러는 란즈베르크 감옥에서 9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합니다.

 

이 책은 후에 나치 이데올로기의 바이블이 되었습니다.

 

 

4.합법적 독재자의 탄생: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들다

 

4.1. 대공황과 나치당의 부상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상황을 교묘히 이용해 나치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는 독일의 경제 위기와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의 책임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며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4.2. 총리 취임과 전권위임법: 민주주의의 종말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마침내 독일의 총리로 취임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3월에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켜 사실상 독재 권력을 장악합니다.

 

독일연방의회(https://www.bundestag.de/)는 이 시기 독일 민주주의의 붕괴 과정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5.제3제국의 건설: '새로운 독일'의 암울한 비전

 

5.1. 글라이히샬퉁: 모든 권력의 나치화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이라는 정책을 통해 독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나치화했습니다.

 

정당, 노동조합, 언론, 교육 등 모든 분야가 나치당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5.2.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책의 본격화

 

나치 정권은 '순수 아리안 민족'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내세워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통해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점차 그들을 사회에서 고립시켜 갔습니다.

 

 

6.전쟁으로 치닫는 유럽: 히틀러의 팽창 정책

 

6.1. 재무장과 라인란트 진주: 서방의 유화정책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독일의 재무장을 추진했습니다.

 

1936년에는 비무장 지대였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팽창 정책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6.2.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1938년 히틀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강제로 병합시킵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방을 요구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 협정을 통해 이를 승인합니다.

 

이는 소위 '유화정책'의 절정이었습니다.

 

7.세계대전의 발발과 나치의 전성기

 

7.1. 폴란드 침공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실질적인 전투는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가짜 전쟁'이라고 불렸습니다.

 

7.2. 번개전의 성공과 유럽 대륙 지배

 

1940년 봄, 독일군은 '번개전' 전략으로 서유럽을 신속하게 점령해 나갔습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차례로 독일에 함락되었고, 영국만이 홀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8.홀로코스트: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

 

8.1. 최종해결책과 체계적 학살의 시작

 

1941년 소련 침공과 함께 유대인과 기타 소수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이 결정되면서 유대인 말살 정책이 체계화되었습니다.

 

8.2. 죽음의 수용소와 대량 학살의 실상

 

나치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죽음의 수용소를 설립하여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가스실과 화장터를 통해 수백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량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생존자들의 증언은 야드 바셈 세계 홀로코스트 추모관(https://www.yadvashem.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관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존하고 교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9.제3제국의 몰락: 광기의 끝

 

9.1. 소련 침공의 실패와 전세 역전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합니다.

 

작전명 '바르바로사'로 알려진 이 침공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과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이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는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이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9.2. 베를린 함락과 히틀러의 최후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이 성공하면서 서부전선에서도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합니다.

 

동서에서 압박을 받는 독일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자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4월 30일, 그는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고, 이로써 12년간의 나치 독재와 6년에 걸친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습니다.

 

 

10.히틀러의 유산: 역사의 경고와 교훈

 

10.1. 뉘른베르크 재판과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나치 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이 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서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국제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인도에 반한 죄'라는 새로운 개념을 확립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https://museums.nuernberg.de/memorium-nuremberg-trial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2. 분단된 독일과 나치의 유산

 

전쟁 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이는 냉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서독에서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나치 시대의 잘못을 반성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지만, 동독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상대적으로 미흡했습니다.

 

10.3. 현대 사회에 남긴 영향과 교훈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역사는 현대 사회에 깊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극단주의의 위험성, 인권의 소중함, 민주주의의 가치 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역사는 인종주의와 차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현재 나치 시대의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뮌헨의 나치 문서센터 등 여러 기관들이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1.히틀러에 대한 미스터리와 논란들

 

11.1. 히틀러의 유대인 혈통설

 

흥미롭게도, 히틀러의 조상 중 유대인이 있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 아이러니한 대조를 이루는 설로, 많은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아직 확실히 입증되지는 않았습니다.

 

11.2. 히틀러의 성적 취향에 대한 논란

 

히틀러의 사생활, 특히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11.3. 히틀러의 탈출설

 

전쟁이 끝난 후, 히틀러가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고 남미로 도주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학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었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2.결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히틀러의 삶과 그가 일으킨 비극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 개인의 광기가 어떻게 전 세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나침반입니다.

 

히틀러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 인권의 소중함, 그리고 극단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히틀러와 나치즘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